국내여행지 소개

삼척을 걷다

meiser 2012. 2. 22. 18:06

 

 

강원 삼척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 부근. 길게 바다 쪽으로 내민 야트막한 구릉의 능선을 따라 걸을 때 시선이 닿는 좌우가 모두 푸른 바다다. 마치 바다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매혹적인 길이다.


실직국’이라니 혹 ‘실직(失職)’을 먼저 떠올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 실(悉)’자에 ‘곧을 직(直)’자를 쓰는 ‘실직(悉直)’이랍니다. 강원 삼척에서 번성하다가 1900여년 전 신라에 복속돼 사라지고 말았다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400년 뒤. 삼척에서는 신라 장군 이사부가 나무로 깎은 사자를 배에 싣고 울릉도와 독도를 정벌하러 나섭니다. 거기서 또 20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 바닷가 벼랑을 걷던 수로부인에게 소를 몰고 가던 늙은이가 철쭉꽃을 바치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으신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


그 많은 이야기들이 잠겨 있는 삼척엘 갑니다. 실직국의 전설을 따라서, 신라 장군 이사부의 행로를 따라서, 삼국유사 속 수로부인에게 꽃을 건네던 늙은이를 따라서 걷는 길입니다. 먼 시간 저편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은 다 삭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수로부인이 건네받았다는 철쭉도 아직 피려면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삼척을 찾아가는 것은 마치 역사의 행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삼척의 길은 늘 그렇듯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삼척에는 도처에 길이 얽혀 있습니다. 근래에 만들어진 ‘관동팔경을 따라가는 녹색경관길’이 있고, ‘해파랑길’이 있으며 ‘산소길’이 있습니다. 여기다가 구불구불 해안을 달려가던 옛 7번 국도도 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이 길은 모두 다 타박타박 걷는 길입니다. 파도가 힘차게 일어선 해안을 걷기도 하고,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언덕을 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화와 같은 역사와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관통합니다. 숨가쁘게 오르는 산길도 있고,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해안길도 있습니다.


삼척의 그 길들을 하나하나 짚어봤습니다. 한때 번창했던 포구의 영화를 굽어보는 자리에 올라서 시야 가득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능선길을 걷기도 했고, 이제 막 얼음이 풀린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산중의 길을 따라 오르기도 했습니다. 지자체가 저마다 이어 붙여 경쟁적으로 만들어낸 길의 행로를 지도 삼아서 따르긴 했으되, 다 걷고 나서는 곧 그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봄볕이 기웃거리고 있는 이즈음 삼척에서는 해안가나 숲길 어디서든지 그저 걷기 시작하면 그게 길이 되는 까닭입니다. 지도 한 장 없어도 그저 해안을 따라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해도 삼척에서는 훌륭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강원도의 도보길 ‘산소길’이 이어지는 삼척의 쉰움산 정상 부근. 정상의 암반에는 바위를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떠낸 듯한 수많은 구멍들이 있는데, 빗물이 고여 찰랑이는 구멍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50개의 우물이 있다’고 했다. 쉰움산이란 이름도 ‘쉰개의 우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 가야 할 길을 찾다


고성,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 동해안을 끼고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강원도의 땅을 꼽아보자면 이렇다. 이들 지역에는 유독 ‘도보여행 코스’가 많다. 아마도 동해안의 짙푸른 바다와 포구를 따라가는 길만큼 화려하고 낭만적이며 걷기 좋은 길이 또 없기 때문이리라.


이곳의 도보 길을 하나하나 꼽아보자. 우선 ‘관동팔경 녹색경관길’이 있다. 관동팔경의 명소를 잇겠다며 국토해양부가 지자체와 협력해 만들어낸 길이다. 부산 오륙도부터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무려 688㎞를 잇는 국내 최장 트레일코스 ‘해파랑길’도 이곳을 지난다. 이건 문화체육관광부의 작품이다. 또 강원 땅을 속속들이 짚는 ‘산소길’도 여기 있다. 이 길은 강원도가 낸 것이다. 여기다가 국도 직선화로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앉아 도보 여행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옛 7번 국도도 새로 낸 길 아래 밑그림처럼 앉아 있다.


이렇게 길은 4개지만, 각각의 도보길은 지자체에 따라, 혹은 주제에 따라 길 이름이 다시 나뉘고, 그렇게 붙여진 이름의 길은 또다시 너덧개의 코스를 거느린다. 그러니 이곳에는 어림잡아 50∼60개에 육박하는 도보 코스가 놓여 있는 셈이다.


그 길이 다 제 나름의 코스를 갖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른 이름의 길들이 서로 만났다가 흩어지길 반복한다. 심지어 어떤 구간은 길이 다 겹쳐지면서 산소길이면서 해파랑길이고, 또 관동팔경길이기도 하다. 빼어난 길을 골라주겠다고 나선 이들이 오히려 길을 얼키설키 헝클어버린 형국이다. 이쯤되니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고, 한편으로는 ‘아예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 뒤엉켜버린 길의 이름을 가린다 해도, 지금 걷는 길이 어떤 코스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동해안을 따라가는 도보길은 저 스스로 빛난다. 그 길의 이름이 어떤 것이든, 그 코스가 몇번째이든 무슨 상관일까. 봄볕 속에서 바다를 끼고 있는 언덕을 오르내리고, 한적한 해변의 백사장 길을 타박타박 걷다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풍광과 작은 포구마을의 소박한 정취를 두루 만나게 된다.


해안을 따라 걷는 도보여행의 목적지로 삼척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쪽의 바닷길 경관이 빼어남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포구마다 소박하고 정겨운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척의 바다는 강릉의 정동진처럼, 속초의 대포항처럼 닳고 닳지 않고, 고성의 가진항이나 공현진처럼 서늘하지도 않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지만 쓸쓸하지 않다.


게다가 삼척에는 길에 잠긴 이야기가 어느 곳보다 더 깊다. 이쪽의 해안가에 고대국가 실직국이 번성을 누렸고, 신라장군 이사부가 울릉도 정벌을 나섰으며, 소를 탄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헌화가를 부르며 꽃을 바쳤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의 것으로 전해지는 능이 있고, 태백산에 버금가는 영험함이 깃들었다는 쉰움산도 있다.


삼척의 해안길을 걸으면 차로 지나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된다. 파도가 이루는 결을 어느 쪽에서 보아야 가장 빛나는지, 어촌마을의 블록 담 위의 빨랫줄에서 생선이 잘 말라가는 풍경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손님 끊긴 해안가 구멍가게의 난로는 또 얼마나 훈훈한지….


해안가를 타박타박 걸으면서 보아야 할 것들이 어디 바깥의 풍경뿐일까. 빠르고 느리지 않게 균일한 속도로 걷다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자신의 내부로 향하기도 한다.


삼척의 해안 송림 사이로 달리는 해양레일바이크. 바다를 끼고 철로를 달리는 정취가 제법이다.


# 삼척에서 바다를 보는 가장 아름다운 길


삼척에서 도보코스로 첫 번째로 꼽을 만한 곳이 바로 동해시 추암의 촛대바위쯤에서 시작해서 삼척해변덱길을 지나서 정라항에 이르는 구간이다.


촛대바위로 유명한 추암은 동해와 삼척의 경계쯤에 있다. 추암해변의 절경이야 이미 알려진 것. 해변을 지나면 곧 신라 때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러 배에 나무로 깎은 사자를 싣고 삼척에서 출발한 신라장군 이사부를 기리는 ‘이사부 사자 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전시물은 하나 없고, 도자기들과 난데없는 유리공예 작품들만 전시된 기념관이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기념관의 유리창을 통해 굽어보는 해안의 경치만큼은 뛰어나다.


길은 몇걸음 만에 곧 신라향가 ‘헌화가’에서 늙은이가 꽃을 바친 수로부인을 기리는 ‘수로부인 공원’으로 이어지고 이때부터 삼척이 자랑하는 ‘새천년 해안도로’가 시작된다. 이 길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난 1999년에 해안가의 절경지대를 깎아내 만든 길이다.


삼척시가 가장 낭만적인 해안도로를 내려 물색하다 택한 길이라니 그 정취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도로를 낼 때 바다 쪽에는 보도를 놓지않아 차로 지날 때마다 아쉬웠던 곳인데, 관동팔경 길을 조성하면서 최근 바다 쪽 길 옆으로 나무덱과 보도를 놓는 공사가 마무리됐다. 기암괴석이 깔린 갯바위를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걷는 운치 넘치는 길이 놓인 것이다.


새천년해안도로를 지나 정라항까지 걸어도 좋겠고, 내친 김에 죽서루까지 들렀다가 삼척교를 건너 오분리의 해안까지 가서 이사부가 배를 띄워 울릉도로 출발했다는 곳에 세워진 출항기념비를 만나고 돌아서도 좋겠다.


두 번째로 추천할 만한 길이 해신당 공원에서 임원항을 잇는 구간이다. 관동팔경길 중에서 ‘임원 해맞이공원길’이라 따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바다에서 한발짝 물러선 부드러운 능선을 오르내리는 길이다.


동해안 일대에서 조망이 좋은 곳을 찾는 요령 한 가지. 보통 해안가의 군부대나 초소 부근이 가장 경관이 빼어나다. 해안을 감시하는 군부대나 초소는 시야가 시원스레 트여 있는 곳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초소나 군부대가 있는 곳치고 뛰어난 경치를 갖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런데 이 길이 바로 해안초소를 거느린 군부대의 복판을 가른다. 능선의 마루에 올라설 때마다 솔숲과 시누대숲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남화산이다. 남화산은 임원항 뒤편에 솟아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 임원항에서 정상까지는 나무덱으로 길이 놓여 있고, 정상에는 전망대와 다양한 조각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해안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나무덱길을 걷노라면 마치 양쪽으로 펼쳐진 바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임원항은 한때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취항하던 곳. 예전보다 못하다지만, 이즈음도 일대의 수산물들이 다 이곳으로 모여든다. 해신당 공원에서 출발해 남화산 공원에 올랐다가 임원항으로 내려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생선회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 쉰움산… 오르지 않고 걷는 산


삼척에서 세 번째로 추천할 만한 걷기 코스는 쉰움산을 오르는 길이다. 도보여행에 웬 등산이냐 싶지만, 이 길은 강원도에서 조성한 ‘산소길’의 한 구간이다. 쉰움산의 해발고도는 683m로 이웃한 두타산과 청옥산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산길이 워낙 유순해 해발고도에 비해서도 훨씬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